철학자가 1900km를 걸으며 깨달은 것들
철학자가 1900km를 걸으며 깨달은 것들
“여보, 우리 국토대장정하지 않을래?”
“까짓 거 뭐, 그럴까?”
영국의 신문기자이자 철학자인 게리 헤이든. 그가 에너지 넘치는 아내 웬디의 국토대장정을 흔쾌히 승낙한 건 웬디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웬디와 상의 끝에 그들은 땅끝과 땅끝으로 가는 여러 코스 중 존오그로츠라는 곳에서 랜즈엔드로 이어지는 조글(joGLE) 코스로 가기로 합니다.
그러나 게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 여정이 스코틀랜드 북부 땅끝에서 잉글랜드 남서부 땅끝까지 이르는 1900km, 250만 걸음, 3개월이 걸린다는 것을요...
“까짓 거, 해 보지!”로 시작한 원정 첫날부터 게리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합니다. 15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걸음은 그의 입에서 “젠장!”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죠.
원래 운동과 산악을 좋아했던 아내 웬디는 행복하고 태평할 뿐입니다. 더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게리. 게리는 웬디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250만 걸음이나 걸어야 한다는 거, 알아?”
“끝내주네!” 웬디의 말에 게리는 할 말을 잃고, 이 상황을 무를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게리와 웬디의 하루 일과는 잠에서 깨고, 텐트를 접고, 걷고, 텐트를 치고, 잠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게리는 무거워지는 발걸음에 자연스럽게 눈길을 땅 밑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머릿속을 철학적 사유로 가득 차게 만들었죠. 게리는 축 늘어지는 기분을 추스르기 위해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문장을 곱씹었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세상이 끔찍하고, 끔찍하고, 끔찍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버트런드 러셀
조글 코스를 걷는 여행자라면 달걀이 달걀인 것만큼이나 자명하게, 아픈 발과 욱신거리는 팔다리, 궂은 날씨와 피로, 사고, 실망감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여행이 아름다운 풍경 속 등대와 바닷바람이 다 아니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여행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면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러셀의 말처럼 “이거 끔찍하군!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군.” 으레 그렇다는 듯 대처할 수 있는 것이죠.
험난한 여정 속에서 우울한 게리에게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15kg짜리 배낭을 내 몸인 듯 무게감을 느끼지 못했고, 발걸음도 가벼워졌습니다.
도보 여행의 시련과 도전이 즐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죠. 하루하루 장애물과 맞서 싸우고 이겨나가는데서 즐거움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놀라운 변화에 그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곱씹게 됩니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의미 있는 어떤 목표를 위해 애쓰고 분투하는 일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고통도 어느새 기쁨과 환희로 바뀌고 자신이 전에 누렸던 사소한 일상들이 궁극의 행복이었음을 깨닫는 게리.
그는 어느 날, 스팅의 <프래자일> 속 노랫말을 되새기며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삶은 순간이야. 거의 시작되자마자 끝이 나지. 장미꽃처럼 빠르고 가차 없이 시들어 버려.
하지만 바로 그래서 더없이 아름다운 거야.'
- 스팅, 노래 <프래자일>에서
하루 57km를 행군한 그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맥주 한 잔, 그리고 휴식을 취하며 먹었던 커피 한 잔의 행복.
그는 행복하려 애쓰지 않고 오직 종착지인 랜즈엔드까지 가리라는 생각만으로 걷다 보니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을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목적에 확고하게 쏟는 사람만이 행복하다.
··· 다른 무엇가를 목표로 삼는 동안 행복은 덤으로 따라온다.'
- 존 스튜어트 밀
이것은 그가 조글 트레킹 중에서 발견한 진리였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욱 명확해지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게리에게 조글 트레킹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추억들을 특별함으로 채워 준 건 러셀, 플라톤, 루소, 에피쿠로스, 니체 등.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누군가 게리에게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기로 다짐합니다.
“제일 좋은 곳은 없었어.
제일 안 좋은 곳이 없었던 것처럼.”
걷기를 통해 나오는 생각만이 어떤 가치를 지닌다.
- 프리드리히 니체